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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기록♡

<정의란무엇인가>06. 평등을 강조하는 시각 : 존 롤스

p.213 대부분의 미국인은 사회 계약에 서명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할까? 무슨 근거로 우리 정부가 그러한 합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존 로크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합의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암묵적 합의는 실제 합의에 비해 흐릿한 형태다.

이마누엘 칸트는 가상적 합의를 주장한다. (...)어떻게 진짜 합의의 도덕성을 대체할 수 있겠는가?

미국 정치 철학자 존 롤스(1921~21002)는 이 질문에 분명한 답을 내놓는다. 그는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할 것인지를 묻는 방법으로 정의를 생각해보자고 주장한다. 

215. 롤스가 생각한 사회 계약의 개념은 이처럼 원초적으로(어떤 계층, 성별, 인종, 민족, 정치적 견해, 종교적 신념 등등을 잠시 잊고 '무지의 장막'뒤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상상하는 것( p,214))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 합의다. 롤스는 (이성적이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원칙을 고를지 자문해 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이 현실에서 자기 이익에만 동기 부여되어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ㄴ다. 다만 사고 실험을 위해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배제할 뿐이다. 광ㄴ 우리는 어떤 원칙을 ㅌ택할까?

우선 공리주의를 택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추론했다. 우리는 무지의 장막 뒤에서,'어쩌면 내가 억압받는 소수에 속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롤스는 이 가상적 계약으로부터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1. 언론 및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원칙(이는 사회적 공리나 일반적 복지에 대한 고려보다 앞선다)

2. 사회적, 경제적 평등관 관련되어 있다. 소득과 부를 똑같이 나누라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불평등한 사회적, 경제적 배분은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허용된다.

<계약의 도덕적 한계>

216. 롤스의 가상적 계약에 담긴 도덕적 효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제 계약의 도덕적 한계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우리는 두 사람이 타협할 경우, 합의 조건이 공정할 것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달리 말해, 계약으로 인해 당사자들이 정한 조건이 정당하다고 간주한다. 하지만 계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계약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계약을 실제로 체결했다고 해서 도덕성이 그 자체로 충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과 내가 타협했다고 해서 그것이 공정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계약이 체결되더라도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항상 물어야 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계약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며, 독립적인 공정성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헌법?(노노) 합의? (세모) p.219. 합의만으로도 의무가 생길까? 아니면 혜택이나 도움을 주고받은 뒤에야 의무가 생길까? 이 논쟁은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계약의 도덕적 문제를 보여 준다. 즉 실제 계약은 자율과 호혜라는 두 가지 이상의 실현을 통해 도덕적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자발적으로 맺은 계약은 자율을 표현한다. 계약으로 생긴 의무는 스스로 부여한 것이기에 중요하다. 상호 이익을 위한 도구로서 계약은 호혜라는 이상에서 나온다. 계약을 이행할 의무는 상대가 우리에게 준 혜택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에서 발생한다. 

현실에서 이러한 이상(자율과 호혜)은 불완전하게 실현된다. 어떤 합의는 자발적으로 맺어졌음에도 서로 간에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또 어떤 때는 계약을 하지 않았더라도 호혜 원칙에 따라 내가 얻은 혜택에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의무가 생길 수도 있다. 여기에 합의의 도덕적 한계가 있다. 즉 어떤 경우엔 합의만으로는 도덕적으로 구속되는 의무가 생기지 않고, 또 어떤 경우에는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합의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경우 : 야구 카드와 물이 새는 변기>

p.220 이 두 가지 사례(야구 선수들과 카드의 가치에 대해 동생보다 많이 알고 있는 형이 동생에게 불공정한 거래를 제안하자 보다못한 저자가 아빠의 승인이 나기 전에는 거래가 성사될 수 없다는 규칙을 만듬/시카고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변기에서 물이 새서 배관공을 불렀는데 수리비로 5만달러를 요구함)

두 사람이 아무리 자유롭게 합의했다 하더라도 터무니없이 불공정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 사례를 통해 계약의 도덕적 한계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합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둘째, 합의만으로 구속력 있는 도덕적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런 계약은 상호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과는 거리가 멀고 호혜라는 이상을 비웃을 뿐이다. 

221. 이제까지 나는 합의가 도덕적 의무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쪽에 지나치게 유리한 거래는 상호 이익과 거래가 멀어서, 아무리 자발적으로 합의했더라도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제 더 도발적인 주장, 즉 합의는 도덕적 의무의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시하고자 한다. 상호 이익이 충분히 존재한다면, 합의의 행위가 없더라도 도덕적으로 호혜 원칙을 주장할 수 있다.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경우 : 흄의 집과 고무롤러맨>

18세기 스코틀랜드의 도덕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이야기. 흄은 젊었으르 때 로크의 사회 계약 사상을 강하게 비판. 그는 로크의 사상을 "현실성이 전혀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철학적 허구"이며 "상상할 수 있는 사고 중에 가장 불가사의하고 이해할 수 없는 사고"라는 글을 썼다. 그런데 몇년 뒤, 합의는 의무가 생겨나기 위한 기본 전제가 아니라는 그의 반박이 시험대에 오르는 사건이 벌어졌다. 

222. (흄은 에든버러의 집을 친구에게 임대해주었고 그 친구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재임대를 했는데 집이 수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흄과 상의하지 않고 집수리를 맡겼고 수리업자는 흄에게 청구서를 보냈다.) 흄은 "에든버러에 있는 집을 전부 돌아다니며 수리할 곳이 있으면 집주인과 합의하지 않고 수리해놓고 요구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을 핌.

흄은 자기 집수리 문제에서만큼은 합의가 없어도 순전히 이익만을 기반으로 도덕적 의무가 생겨난다는 평소 논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자기 변호에 실패했고, 법정은 그에게 비용을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223. 고무롤러맨 유리닦는 고무밀대와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다니며 신호 대기중인 자동차를 덮쳐 차 앞 유리를 닦은 후 돈을 요구. 흄의 집수리업자가 그랬듯이, 이익에 따른 의무론을 바탕으로 돈을 요구했던 것. 하지만 합의 없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와 구걸행위는 차이가 불분명. 

<이익인가, 합의인가? 샘의 자동차 수리>

합의에서 의무가 생겨나는지, 이익의 발생에서 의무가 생겨나는 지에 대한 이견으로 벌어지는 충돌의 예. 

226.<완벽한 계약 상상하기>

게약은 자율과 호혜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으로부터 도덕적 효력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실제 계약에서는 대게 이러한 이상이 전부 충족되는 경우는 드물다. 내가 우월한 지위에있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면, 내동의는 전적으로 자발적이라기보다는압력이나(극단적일경우) 강요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또 내가 교환 대상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면, 그 거래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극단적으로는 사기를 당하거나 속는 경우도 있다.

합의했다는 사실만으로는 공정하다고 확신할 수 없다. 계약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도덕성이 보장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공정한 계약인가, 두 사람이 무엇에 동의했는가?"를 묻는 것은 항상 의미가 있는 일이다. 

227. 반면 힘과 지식이 동등하고 똑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상상해보자. 계약대상이 배관 수리나 일반적인 거래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지배하고 우리에게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배분하는 원칙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게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에는 강제나 속임수, 그 밖의 불공정한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합의라는 미덕만으로도 계약 조항들은 모두 공정할 것이다. 

 그런 계약을 상상할 수 있다면, 평등이 보장된 최초의 상황에 대한 가설적 합의라는 롤스의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무지의 장막은 힘과 지식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보장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사회적 지위, 장단점, 그들의 가치와 목적을 모른다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거래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된다. 

각자의 재산, 사업, 직업 등에 관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그 결과는독단적인 사태로 왜곡된다.(...)원초적 위치에서 정당한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참여자들은 공정한 위치에서 도덕적 인간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이러한 최초의 계약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임의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지의 장막 뒤에서의 가상적 합의는 실제 계약의 흐릿한 형태가 아니며, 따라서 도덕적 기반이 약하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실제 게약의 순수한 형태이므로 도덕적으로도 더 강력하다. 

228<정의의 두 가지 원칙>

롤스가 옳다고 가정해 보자. 무지의 장막 뒤에서, 즉 원초적 평등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어떤 원칙을 선택할지 묻는 방법으로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하자. 과연 어떤 원칙이 나올까?

롤스는 우리가 공리주의를 선택하지않을 것으로 보았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는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또 존중받고 싶어 할 것이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다. 만약 자신이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소수 집단에 속한 것으로 판명될 경우, 설령 다수가 쾌락을 느낄지라도 자신이 결코 억압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무지의 장막이 올라가고 실제 삶이 시작되었을 때, 자신이 종교 박해나 인종 차별의 희생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공리주의를 거부하고, 모든 시민이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할 것이다. 또한 이 원칙이 전반적 복지를 극대화하려는 노력보다 우선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리의 기본권과 자유를 희생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을 택하게 될까? 자신이 지독히 가난한 처지에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처음에는 소득과 부의 완전 균등한 배분을 선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윽고 그보다는 나은 방법, 심지어 가장 하층민에게도 더 나은 선택이 있ㅇㄹ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약간의 불평등을 인정(예를 들어 의사에게는 버스 기사보다 더 높은 보수를 주는 식)하는 대신 빈곤층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는 등 환경 개선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가능성을 허용한다면, 사회에서 가장 약자에 속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경우에만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롤스의 소위 '차등 원칙'을 우리는 받아들일 것이다. 

229. 이 차등 원칙은 평등에 어떤 효과를 발휘할까?

물론 롤스의 이론은 개개인의 소득이 공정한지 평가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롤스의 이론은 사회의 기본 구조에 관한 것이며 권리와 의무, 소득과 부, 권력과 기회의 배분 방식에 관한 것이다. 롤스가 묻고자 하는 것은 전반적으로 볼 때 빌 게이츠의 재산이 가장 못사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돌리는 사회 체제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자들의 누진세가 가난한 사람들의 보건, 교육, 복지를 증진시키고 있는가? 그 체제가 엄격한 평등만을 추구하는 사회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더 잘살게 한다면, 그러한 불평등은 차등 원칙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230. 원초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차등 원칙을 선택한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롤스는 사람들이 자신의 기본적인 삶을 지배할 원칙을 선택할 때 그러한 모험을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 그런데 차등 원칙을 지지하는 롤스의 주장이 단지 원초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위험을 회피할 것이란 추측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느느 건 아니다. 

무지의 장막이라는 장치의 밑바탕에는 사고 실험과는 별개의 도덕적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 그 주장의 핵심은 소득과 기회의 분배는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 요소에 기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임의적 요소 배제하기>

롤스는 정의에 대해 대립적인 몇몇 이론의 비교를 통해 그러한 주장을 제시했다. 우선 봉건 귀족 사회부터 시작한다. (...)

231.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을 배분한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다고 보았다.(귀족이나 농노로 태어난 것의 환경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삶의 전망이 이런 임의적 요소에 달려 있다면 정의롭지 않다. 

시장 경제 사회는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그런 임의성을 교정한다. 재능 있는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한다. 시민들은 기본적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받고, 소득과 부는 자유 시장을 통해 분배된다. 이처럼 제도적으로 기회 균등 및 자유 시장을 보장하는 체제는 자유지상주의 정의론에 부합한다. 이 체제는 출생에 따라 계급이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봉건 사회와 카스트 사회보다 개선된 모습을 보인다. 법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노력과 경쟁을 법으로 허용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기회가 균등하지 않게 배분될 수도 있다. 

가족의 지원과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확실히 유리하다. (...)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해야 한다면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롤스는 기회 균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자유 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배분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 자유지상주의체제에서 가장 정의롭지 못한 부분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으로 봤을 때 대단히 임의적인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이 허용된다는 점"이다. 

이 부정의를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은 사회적, 경제적 불리함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다.

232.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는 제도적 기회 균등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조치들로 이를 실현하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공정성을 해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풍요로운 가정 출신 학생과 똑같은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교육 기회를 고르게 제공한다. 

능력주의라느느 명분에 부합하게 자유시장을 통해 소득과 부가 정당하게 배분되려면 재능을 계발할 기회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져야 한다. (같은 출발선에서 경주를 시작)

그런데 롤스는 능력주의라는 개념이 임의적 요소로 인한 부당한 이 점을 어느 정도 상쇄하기는 하지만, 정의롭다고 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 빠른 주자가 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노력에만 달려있지 않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이 우연이듯, 빠른 주자가 되는 것 역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우연이다. 롤스는 이렇게 썼다. 능력주의 시스템이 "사회적 우연의 영향을 완전히 제거한다 해도, 타고난 능력과 재능에 따라 부와 소득의 배분이 결정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롤스가 옳다면, 교육 기회가 균등한 사회에서 운용되는 자유 시장도 소득과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지 못한다. 이유는 이렇다. 233. "타고난 운에 따라 배분되는 몫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이다. 소득과 부의 배분이 역사적, 사회적 행운으로 결정되어서는 안 되듯이, 타고난 자질에 따라 결정되어도 좋을 이유는 없다."

롤스는 능력주의 정의 개념 역시 자유지상주의 개념과(비록 정도는 약하지만) 같은 이유로 결함이 있다고 결론내린다. 둘 다 배분되는 몫이 도덕적으로 볼 때 임의적인 요소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황이 배분되는 몫을 결정하는 데 미친 영향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 타고난 우연이 배분되는 몫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게 된다. 또 타고난 우연의 영향을 고민하다 보면 사회적 상황의 영향을 고민하게 된다.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임의적이다."

정의에 관한 자유지상주의 개념과 능력주의 개념에서 모두 발견되는 도덕적 임의성이라는 결함을 감안하면, 평등을 보다 강조하지 않는 개념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평등을 보다 강조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교육 기회의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과 선천적인 재능의 불평등을 수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떤 주자가 다른 주자에 비해 빠르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고, 그 빠른 주자에게 납덩이 신발이라도 신겨야 할까? 평등주의에 비판적인 일부 사람들은, 능력주의 시장 경제 사회의 유일한 대안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어 평등을 이루는 방법 뿐이라고 말한다. 

나도 없는 사람으로, 자유지상주의보다는 평등쪽을 원하지만 그래도 납덩이 신발은 너무했다.  평범한 나에게 그런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그 능력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아닐까?

234<평등주의 악몽>

커트 보네거트의 단편<해리슨 버거론>에서는 바로 이런 걱정을 반유토피아 공상 과학으로 묘사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때는 2081년ㄹ, 마침내 모든 사람이 평등해졌다." 이 철저한 평등은 미국 평등관리국 요원들이 이뤄 낸 성과다.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은 좋은 지능에 불이익을 주는 수신기를 귀에 꽂고 다녀 정부는 약 20초마다 날카로운 잡음을 쏘아 보냈다. 

열네 살의 해리슨 버거론은 매우 똑똑하고 잘생기고 재능이많은 아이여서 누구보다 무거운 장비를 쓰고 다녀야했다. 140킬로그램에 달하느느 무게를 짊어지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해리슨은 평등주의 압제에 맞서 과감히 저항하고자 온갖 장비를 벗어 던졌다. 

235. 하지만 롤스의 정의론은 이런 반박에 쉽게 공격받지 않는다. 롤스는 획일화된 평등을 능력주의 시장 경제 사회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지 않는다. 롤스가 내놓은 대안은 소위 차등원칙으로, 재능 있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으면서 선천적인 재능과 소질의 불공정한 분배를 바로 잡는다. 어떻게? 재능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개발하고 연마하도록 독려하되, 그 재능으로 시장에서 거둔 대가는 공동체의 몫임을 이해시킨다. 가장 앞선 주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말고 최선을 다해 달리게 하라. 승자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점을 미리 알려주면 된다

헐 차등원칙이란 재능있는 사람이 공동체에게 재능기부를 하는 거였구나. 재능있는 사람이 공동체의 몫이라는 부분은 살짝 거슬렸지만 우리의 김연아 선수, 손흥민, BTS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우리나라의 국뽕을 맞게 해주는 효과?)

차등원칙은 소득과 부를 똑같이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 밑바탕에는 평등에 대한 단호하고 고무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차등원칙은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공동자산으로 여기고, 그 재능을 이용해 얻은 이익은 사실상 공유하자고 주장한다. 천부적 혜택을 입은 사람들은 그들이누구든,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황을 개선할 때만 자신들의 행운을 이용해 이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천부적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재능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이득을 얻어서는 안 되며, 그들을 훈련시키고 교육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갚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그러한 행운을 얻지 못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누구도 뛰어난 능력을 타고날 자격이 있거나 사회에서 보다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를 다룰 다른 방법이 있다. 임의적 요소들의 혜택이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도록 사회의 기본 구조를 조정할 수 있다.

236. 이제 분배 정의와 관련된 네 가지 이론을 살펴보자. 

1. 봉건 제도 혹은 카스트 제도:출생에 따라 계층이 정해짐.

2. 자유지상주의 :제도적 기회 균등을 인정하는 자유시장.

3. 능력주의 : 공정한 기회 균등을 인정하는 자유 시장.

4. 평등주의 : 롤스의 차등 원칙.

롤스는 앞의 세 이론에서는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 요소(출생, 사회적, 혹은 경제적 이점,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 등)에 따라 배분되는 몫이 정해진다고 주장한다. 오직 차등 원칙만이 운에 따른 소득과 부의 배분을 피할 수 있다. 

임의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를 가정하는 논리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둘은 비슷한 점이 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우연히 얻게 되는 임의적 요소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반박1. 포상은 재능 개발에 대한 장려금이다. 

롤스의 차등원칙에 대한 반박 두 가지. 1. 이들이 올리는 소득은 일종의 장려금이라는 주장.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조건에서만 재능 있는 사람이 자기 재능으로 이익으르 얻을 수 있다면, 마이클 조던이 점프 슛을 열심히 연습하지 않거나 일찍 은퇴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237. 롤스는 그런 장려금이 어려운 사람들의사정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차등 원칙도 소득 불평등을 허용한다고 답한다. 

장려금 성격의 임금 격차를 허용한다는 것과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노동으로 생기니 열매를 거둘 도덕적 특권이 있다는 말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롤스의 말이 옳다면, 소득 불평등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결과를 이끌어 낼 때만 정당하다. 최고 경영자나 유명한 운동선수가 공장 노동자보다 돈을 더 버는 것은 그들이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반박2 : 포상은 노력에 대한 대가다. 

이상의 반박은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더욱 도전적인 두 번째 반박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받는 포상은 노력의 대가라는 주장. 선천적 재능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니 롤스는 정의를 능력주의로 해석하는 논리를 거부했다. 그렇다면 재능을 열심히 연마한 사람은 어떨까? 빌 게이츠는 오랜 시간 열심히 노력해 마이크로소프트를 발전시켰다. 마이클 조던은 수많은 시간 동안 노력히 농구실력을 연마했다. 238. 재능을 갈고 닦은 노력의 대가는 받을 자격이 있지 않을까?

 

롤스는 노력도 혜택받은 양육 환경의 결과일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노력하고, 도전하고, 소위 높은 자격을 누릴 만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조차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좌우된다." 성공의 다른 요소들처럼 노력 역시 자신의 공이라 할 수 없는 우연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노력하는 태도 역시 선천적 능력 및 기술, 그리고 그가 취할 수 있는 대안들의 영향을 받는 것이 분명하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보다 잘 타고난 사람이 성실하게 노력할 가능성도 높다......."

이처럼 노력해서 얻은 대가마저 도덕적 자격을 주장할 수 없다는 롤스의 정의론에 많은 사람이 회의적이다. 

노력에 관한 롤스의 주장에 대해 토론하고 나서, 나는 대략적인 조사를 실시했다. 우선 형제의 출생 순서가 성실성과 노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학자들의 견해를 알려준다. 첫째가 동생들보다 노동 윤리가 더 강하고 돈도 더 많이 벌며, 전통적 의미의 성공도 더 많이 거둔다. 재미삼아 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약 75~80%가 손을 든다.

239. 첫째로 태어난 것이 자기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출생 순서 같은 임의적 요소가 열심히 일하고 성실히 노력하는 성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면 롤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심지어 노력조차 도덕적 자격의 토대가 될 수 없다.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면 그 대가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는 더 있다. 능력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노력의 미덕을 강조하지만, 사실 그들조차 노력만이 소득과 부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이클 조던보다 더 노력한 농구선수가 있을 것) 그들이 진정으로 포상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기여나 업적이다. 노동 윤리가 아무리 노력을 칭송하더라도, 우리의 성취와 업적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자신의 공을 내세울 수 없는 타고난 재능에서 나온다. 

240. <도덕적 자격 거부하기>

재능 역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 요소라는 롤스의 주장이 맞다면, 분배 정의는 도덕적 자격을 포상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놀라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롤스는 이 결론이 정의에 대한 일반의 상식과는 맞지 않음을 인정한다. "소득과 부, 그리고 삶에서 좋은것들은 도덕적 자격에 따라 배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정의는 행운의 미덕이다. (...) 이제 공정성으로서의 정의는 이 개념을 거부한다."

롤스는 성공으로 향하는 길에 놓인 사회적, 경제적 장벽만 제거하면 누구나 재능이 선사하는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 사회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능력주의 시각을 비판한다. 

우리는 초기 사회적 출발선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자격이 없듯이, 선천적으로 배분된 재능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타고난 능력을 발전시키는 훌륭한 성격조차 당연히 자신의 공이라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 그러한 성격 형성에는 우리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좋은 가정과 사회 환경이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자격이라는 개념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 

241롤스는 도덕적 자격과 자신이 '합법적 기대를 요구할 권리'라고 부른 것과의 중요하면서도 미묘한 차이를 설명한다. 자격 주장과 달리, 합법적 기대를 요구할 권리는 특정 게임 규칙이 정해지고 나서야 생긴다는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권리는 애초에 어떤 게임 규칙을 정해야 하는지는 말해 주지 못한다. 

정의에 관한 여러 뜨거운 논쟁의 밑바탕에는 도덕적 자격과 합법적 권리의 충돌이 깔려 있다. 자격을 중시하는 사람은 부자의 세율을 높이는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소유할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는 행위라고 말한다. 다른이들은 반대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이러한 이점을 누릴 도덕적 자격을 갖춘 사람은 없으며, 사전에 어떤 게임 규칙(세율, 입학 기준 등)을 적용할지부터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누가 무엇을 얻을 권리가 있는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운에 좌우되는 게임과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복권에 당첨되면 당첨금을 받을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내게 당첨될 '자격'이 있었다고는 말을 못한다. 운의 게임이기 때문에 나의 미덕이나 실력과 관계 없다. 이번엔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고 가정해보자. 242. 이들에겐 트로피를 받을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이들에게 승리할 자격이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 답은 이들이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가에달렸다. 우승원인이 행운(결정적 순간의 오심 등) 때문인가, 아니면 상대보다 월등한 경기력(좋은 투구, 몰아치는 타격, 뛰어난 수비 등) 때문인가? 

운에 좌우되는 게임과 달리 실력에 좌우되는 게임에서는 승자로서의 권리가 있는 사람과 승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서로 다를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미덕을 실천하고 행사한 행위를 포상하기 때문이다. 

롤스는 분배 정의가 미덕이나 도덕적 자격의 포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보다는 게임의 규칙이 정해지고 난 뒤, 합법적 기대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일단 정의의 원칙이 사회 협력의 조건을 정하면, 사람들에게는 그 규칙에 따라 벌어들인 이익을 가질 권리가 생긴다. 하지만 조세 제도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써야 한다며 소득의 일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면, 자신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빼앗긴다고 불평할 수 없다. 

사회의 기본 구조를 규제하는 정의의 원칙은(......)도덕적 자격을 언급하지 않으며, 분배되는 몫도 그러한 자격에 부합하는 경향을 보이지 않는다. 

롤스는 다음 두 가지 근거로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 1. 내가 남과의 경젱에서 유리한 재능을 가진 것이 전적으로 나의 공은 아니기 때문. 2. 우연적 요소 역시 매우 중요하다. 특정 시기에 사회가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자질 또한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임의적. (...) 어떤 자질이 사회에 기여하느냐의 평가는 그때그때 사회가 어떤 자질에 많은 포상을 하느냐에 달렸다. 

244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에서 이런 우연이 차지하는 부분을 흔히 간과. 많은 이들이 동시대 사회가 높이 평가하게 된 자질을 어느 정도는 타고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것이 도움이 된다. 관료 사회에서는 상사와 무난히 잘 어울리는 자질이 유리. 대중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TV 화면을 잘 받는 것이 유리하고, 짧고 별 내용없는 우스개를 잘 지어내는 자질이 도움이 된다. 걸핏하면 소송하는 사회에서는 법학전문대학원에 다니거나 법학전문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능력이 도움이 된다. 

사회가 그런 자질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관계가 없다. (...) 그렇다면 그런 사회에서 우리의 가치나 미덕은 지금보다 적은 것일까?

롤스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지금보다는 포상을 적게 받겠지만, 포상의 권리가 적다고 다른 사람보다 가치가 적다거나 자격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현 사회가 귀히 여기고 많이 포상하는 재능을 덜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게임의 규칙이 포상을 약속한 재능을 연마할 경우 그로부터 얻은 이익에 권리가 있긴 하지만, 우리에게 풍부한 자질을 높이 평가해주는 사회에 살아가게 된 특별한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이자 자만이다. 

지금부터 분배의 정의가 도덕적 자격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지 알아보자

<인생은 불공정한가?>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 <선택할 자유>를 추간.자유시장 경제를 노골적으로 당당하게 외친 이 책은 레이건 정부의 교과서이자 찬가가 되었다. 

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자연이 낳은 것을 정부가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매혹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개탄하는 커다란 불공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이 생겨나는지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무하마드 알리가 위대한 권투선수로서의 기술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공정치 못하며, (...) 무하마드 알리가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는 사실도 분명 공정하지 못하다. 하지만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알리가 하룻밤 경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이(......)최하층 사람이 부두에서 비숙련 노동으로 벌 수 있는 일당보다 많지 않도록 제한한다면(......) 알리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공정한 일이 되지 않겠는가?

<정의론>에서 롤스는 자기 논리에 빠진 프리드먼의 조언에 반대한다. 그는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을 신랄하게 지적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천적 재능의 분배나 사회적 여건의 우연성은 부당하기 때문에 제도상의 질서는 항상 결함이 있다는 주장을 우리는 거부해야 하며, 부정의는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조정해야 한다. 물론 때때로 그런 생각이 부정의를 무시하는 변명으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마치 부정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해서 다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의 말처럼 말이다. 자연의 배분 방식은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다.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위치를 갖고 태어어나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자연적인 사실일 뿐이다. 정의냐 부정의냐는 제도가 그러한 사실들을 다루는 방식으로부터 생겨난다. 

롤스는 우리가 그런 사실들을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 사회적 여건을 [우리를 위해]이용하자"고 제안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 철학이 지금까지 내놓은,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이루기 위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이 분명하다. 

나는 이때껏 책을 읽을 때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면 '내가 이걸 안다고 바뀌는 것도 아니고' 자조하며 책을 덮곤 했다. 처음엔 롤스의 정의가, 특히 차등원칙이 재능있는 사람이 시장에서 얻은 이익이 공동체의 것이라고 하는 부분은 헉! 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자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재능있는 이들이건 아니건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각자에게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 사회적 여건을 우리를 위해 이용하자"라고 말하는 롤스가 멋있어졌다. 특히 "부정의는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부분.. 이름도 멋지네 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