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 기록♡

<정의란 무엇인가>02. 최대 행복 : 공리주의

얼라이브라는 영화에서도 본 적 있는 위기상황에서 인육을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선 죽은 사람들이었지만 여기서는 바닷물을 마셔 죽을 것 같은 아이를 살해하여 연명한다. 여기선 '구명보트 사건'이라고 나오는데.. 다 같이 굶어죽는 게 가장 인간다운 걸까? 하지만 인간도 동물이니 약육강식을 발휘하여, 더들리의 판단처럼 가장 약한 사람 하나를 잡아 많은 사람이 살아남는 것도 인간다운 것 아닐까? 그런 걸로 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참 기가막히게 잘 지었다. 개인적으로는 더들리가 선택한 파커가 아마도 가장 어리고, 바닷물을 마셔서 가장 죽을 것 같고, 자신의 동료들이 아닌 사환잡부라는 가장 낮은 계급이었다는 점이 이 사건에서 더들리가 인간으로서의 잔인성을 잘 보여준 게 아닌가 한다.  나 역시 여자에,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급의 일을 하고 있기에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파커라는 표적이 될 것이 뻔하고 잘해봤자 브룩스다. 브룩스 역시 파커가 죽은 이후 그 다음 표적은 일반 선원일 뿐인 자기가 유력하며 나머지 두 명이 한편이 되어버리면 그다음 희생자가 자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게 아닐까?

p.59 1884년 여름, 영국 선원 네 명이 작은 구명보트에 탄 채, 육지에서 1,600킬로미터 떨어진 남대서양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들이 타고 온 미뇨네트호는 폭풍에 가라앉았고, 구명보트에는 순무통조림 캔 두 개를 제외하곤 마실 물조차 없었다. 이 보트에는 선장 토머스 더들리, 일등 항해사 에드윈 스티븐스, 일반 선원 에드먼드 브룩스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었다"고 신문은 전했다. 

그리고 네 번째 승무원은 배에서 심부름과 잡일을 하던 열일곱살 소년 리처드 파커였다. 고아인 파커가 먼 항해 길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커는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다운 야망과 희망을 품고' 비에 올랐으며, 이번 항해를 통해 남자다워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던 네 사람은 지나가는 배를 만나 구조되기를 바라며, 수평선을 지켜보았다. 처음 3일 동안은 순무를 정해 놓은 양만큼 조금씩 먹었다. 4일째 되던 날 바다거북을 한 마리 잡았다. 이들은 바다거북과 남은 순무로 연명하며 며칠을 더 버텼다. 그리고 이후

60. 로 8일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이즈음 파커는 구명보트 한쪽에 누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바닷물을 마시다가 탈이 났기 때문이었다.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고통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19일째 날, 선장 더들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사람을 제기뽑기로 정하자고 했다. 하지만 브룩스가 거부해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음 날도 지나가는 배는 보이지 않았다. 더들리는 브룩스의 고개를 돌리게 하고는 스티븐스에게 파커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더들리는 기도를 올리고, 파커에게 때가 왔다고 말한 뒤 주머니 칼로 파커의 목에 있는 정백을 찔렀다. 양심에 찔려 그 섬뜩한 하사품을 거절하던 브룩스도 나중에는 자기 몫을 받았다. 그렇게 세 남자는 파커의 살과피로 나흘을 더 연명했다. 

이윽고 구조의 손길이 나타났다. 더들리는 당시 상황을 일기에 놀라운 완곡 어구로 펴현했다. "24일째 되던 날,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데, 드디어 배가 나타났다." 생존자 세 명 모두 구조되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돌아가자마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

당신이 판사라면 어떤 판결을 내리겠는가? 상황을 단순화하기 위해 일단 법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오로지 그 소년을 죽인 짓이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인지만 결정하면 된다고 가정하자. 

피고 측이 가장 강력히 주장한 바는 당시 끔찍했던 상황에서는 한 사

61.람을 죽여 세 사람을 살릴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누군가를 죽여서 먹지 않으면, 네 사람 모두 죽을 수밖에없었다는 것이다. 병에 걸려 쇠양해진 파커는 곧 죽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절한 대상이었다. 또한 (...)부양할 가족도 없었다. (...)

이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 첫째, 파커를 죽여서 얻은 이익이 희생보다 정말로 컸는가에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살아난 사람의 숫자, 그리고 생존자 및 그 가족의 행복을 고려한다 해도, 그들이 저지른 살인을 허용한다면 사회 전체에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살인에 반대하는 규범이 약화되거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법을 해석하려는 성향이 늘어나거나, 선장이 배에서 일할 사환을 구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둘째,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그 이익이 희생이라는 비용보다 크다고 하더라도, 무방비 상태의 사환 소년을 죽여서 먹는 행위는 사회적 비용이나 이익을 계산하기에 앞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느낌을 여전히 지울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누군가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남을 이용하는 행위(타인의 나약함을 이용하여 동의 없이 목숨을 빼앗는 짓)는 나쁜 짓 아닌가?

더들리와 스티븐스의 행동에 몸서리 친 사람에겐 첫 번째 반박이 미지근한 불평으로 보일 것이다. 이 반박은, 도덕이란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자들의 사고를 받아들여,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더 많이 계산하고자 했다. 만약 그 소년을 죽인 행위가 도덕적 분노를 일으킬 만한 행위라면, 두 번째 반박이 더 적절하다. 이 반박은

62. 어떤 행동이 옮은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비용과 이익이 얼마인지 결과만을 계산하면 된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또한 도덕이란 그 이상의 무언가(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적절한 방식 등)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구명보트 사건을 바라보는 두 가지 사고방식은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첫 번째 시각은 어떤 행위의 도덕성은 그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어떤 행위든 그로 인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보았을 때 최상의 상태를 만들어 내면 옳다고 본다. 두 번째 시각은 도덕적으로 볼 때, 결과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무와 권리는 사회적 결과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본다. 

구명보트 사건이나 그보다는 덜 극단적인 우리 일상생활에서의 딜레마를 해결하려면, 도덕 철학의 커다란 문제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도덕은 목숨을 숫자로 세고, 비용과 이익을 저울질하는 문제인가, 아니면 어떤 도덕적 의무와인권은 기본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계산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권리가 그토록 기본적인 것이라면, 타고난 권리든, 신성한 권리든,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든, 절대적 권리든 간에, 그것을 어떻게 가려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들이 기본 권리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훌륭한 서문으로 시작한 2장. 첫 번째 시각은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이다. 두 번째는 근데 우리 인간이야.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고. 기계가 아닌이상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가 있는 거야 라고 말하는 시각. 자본주의로 점철된 현대속의 이런 딜레마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여 우리 사회 속에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이 질문에 대한 제러미 밴담(1748~1832)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는 자연권이라는 생각을 조롱하며 "애들이나 하는 헛소리"라고

63.했다. 

영국의 도덕 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은 공리주의 원칙을 만들었다. 공리주의의 핵심은 간결하며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하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벤담에 따르면, '공리'를 극대화하는 행위는 무엇이든 옳다. 그가 말하는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이나 불행을 막는 일체를 의미한다. 

물론 나도 하나 30년 전 윤리 시간에 배운 내용이지만 요새 왕따문제와 결부해볼 때 왕따도 공리주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아이 하나를 잡아서 여러명이 괴롭히는 것. 따지고 보면 이것도 여러명의 재미라는 쾌락 측면에서는 공리주의의 생각에 소름돋게 들어맞는다. 남들과 조금 다른 아이 하나를 병신(!!!) 만들어 버리는 이런 거. 아 진짜 인간에게 포용과 이해와 수용 다름을 인정하는 거 이런거는 배워야만 할 수 있는 거니? 그럼 우리도 참 본능가득한 동물의 세계속에서 너희는 인간이야 이러면 안돼를 가르쳐야만 하는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교육인걸까(삐뚤어졌다 ㅜ ) 차라리 데이터를 주입하면 그대로 따라하는 AI가 인간보다 나을 수 있겠다는 건 이런 생각에서 나오나보다

벤담은 다음과 같은 추론을 통해 자신의 원칙에 도달한다. 우리는 누구나 고통과 쾌락의 감정에 지배된다. 이 감정은 우리의 '통치권자'다. 이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지배할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은 "왕좌에 앉은 그들에게 달렸다".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공리주의 철학은 이를 깨닫고 이러한 사실을 도덕적, 정치적 삶의 근간으로 삼는다. 공리의 극대화 원칙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입법적 차원에서도 적용된다. 어떤 법이나 정책을 집행할 것인지 결정할 때, 정부는 공동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동체란 무엇인가? 벤담에 따르면, 공동체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허구의 집단'이다. 그러므로 시민과 입법자들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 정책에서 얻는 이익을 모두 더하고 모든 비용을 빼면, 다른 정책을 펼 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게 되는가?"

공리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벤담의 주장은 워낙 대담하여 이를 반박

64.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보인다. 그는 모든 도덕적 주장은 행복의 극대화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확실한 의무나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의무나 권리의 존중이 적어도 장기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극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무나 권리를 변호할 근거는 없을 것이다. "공리원칙과 싸우려 드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로 그 원칙으로부터 나온 근거에 기대게 된다"라고 벤담은 썼다. 모든 도덕적 다툼은 알고 보면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극소화하는 공리주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이견일 뿐, 원칙 그 자체에 대한 이견이 아니다. "인간이 지구를 움직일 수 있을까?"벤담이 묻는다. "그렇다. 하지만 밟고 설 다른 지구부터 찾아야 한다." 그리고 벤담에 따르면, 그 유일한 지구, 유일한 전제, 도덕적 논증의 유일한 출발점은 바로 공리 원칙이다. 벤담은 공리 원칙이 정치개혁의 근간이 되는 도덕 과학을 제기한다고 믿었다. 그는 형벌 정책을 더 효과적이고 인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몇 가지 제안을 했다. 그중 하나가 원형 교도소인데, 교도관은 중앙에 있는 감시탑에서 재소자들을 관찰하되 재소자들은 교도관을 볼 수 없게 만든 수형시설이다. 그는 그 교도소를 민간없자(이상적으로는 벤담 자신)에게 운영하게 하고, 그 대가로 민간 업자는 죄수들에게 하루에 열여섯 시간 동안 일하게 해 그 이익을 챙기는 것이다. 벤담의 제안은 거절당했지만, 어느 면에서는 시대를 앞선 제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미국과 영국에서는 교도소 운영을 민간에 위탁하는 법안이 부활하였다. 65. 거지를 한곳에 몰아넣기벤담의 또 다른 제안 가운데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돈을 마련하는 구빈원을 설립해 '극빈자 관리'를 개선하자는 계획이었다. 거리의 거지를 줄일 목적으로 나온 이 계획은 공리주의 논리를 잘 보여 준다. 우선 벤담은 거지와 마주치면 두 가지 방식으로 행복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정이 많은 사람에게는 동정심이라는 고통이, 인정이 없는 사람에게는 혐오감이라는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거지와 마주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공리가 줄어든다. 그러므로 벤담은 거지를 거리에서 쫓아내 구빈원으로 몰아넣자고 제안했다. 굳이 거지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말썽부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친구나 부모들이 이럴 것 같다. 그 아이의 문제 행동을 봐줄만한 사람은 재도 힘들겠지.. 생각하지만 아니면 이상한 애로 낙인찍어버리고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것.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은 이 사회라는 공간에서 함께 사는 이상 서로 부딪히지 않을 수 없고 그런 사건의 해결은 공리주의 해결 원칙으로 해결해왔구나. 따지고 보면 다수결의 원칙도 공리주의에서 온거다.  어떤 사람은 거지에게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벤담은 거지의 공리 측면도 계산에 넣었다. 벤담 역시 구빈원에서 일하는 것보다 구걸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구걸하며 행복해하는 거지보다 그들과 마주쳐 불행한 사람의 수가 훨씬 많음을 지적한다. 결국 구빈원으로 끌려가는 거지들이 어떤 불행을 느끼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일반 대중이 겪는 고통의 합이 그보다 크다고 벤담은 결론을 내린다. 66. 거지가 기록된 생활비를 다 갚기 전에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책정한 보험료가 포함된다. 벤담은 시민이 거지를 붙잡아 구빈원에 넘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도록, 한 명에 20실링의 포상금을 지급하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돈은 거지의 장부에 비용으로 더해진다.

아니 이런 자본주의적인 인간이 있나. 그런데 우리가 고양이 중성화할때 이 방법을 쓰잖아! 고양이 소리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주로 고양이를 포획하고 그는 돈을 받고. 

반박1:개인의 권리가장 두드러진 공리주의의 약점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로지 만족의 총합에만 관심을 두기 때문에 개인을 짓밟을 수 67.있다. 공리주의자들에게 개인은 중요하지만, 이는 단지 모든 이의 선호를 계산할 때 더해지는 개별 항목으로서만 중요하다. 하지만 만약 공리주의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예의와 존중이라는 기본 규범을 어기며 사람을 다루는 다음와 같은 방식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을 사자에게 던지기고대 로마에서는 군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서 원형 경기장에 사자와 기독교도들을 함께 풀어놓았다. 이때 공리주의자가 어떤 계산을 할 지 상상해보자. (...) 공리주의자들은 그 같은 게임으로 인해 사람들이 거칠어져서 로마 거리에서 폭력이 더욱 빈번해지거나, 앞으로 자신도 언젠가는 사자에게 던져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람들 사이에 확산될 수 있음을 ㅇ려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폭력과 공포라는 고통이 그 게임이 주는 쾌락보다 커진다면, 이는 공리주의자들에게 게임을 금지시킬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오락거리로 기독교인들을 잔인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를 겨우 그런 계산에 근거해 금지한다면, 도덕적으로 보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는 것 아닐까?68. 고문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비슷한 물음을, 오늘날 테러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고문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놓고 벌이느 논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이 CIA국장이고, 시한폭탄 사건을 조사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테러 용의자를 잡았는데, 이 사람이 맨해튼을 같은 날 곧 폭파시킬 핵무기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 그가 폭탄이 설치된 장소와 폭탄을 제거할 방법을 털어놓을 때까지 고문하는 것이 옳을까?고문을 찬성하는 주장은 공리주의 계산에서 시작된다. 고문으로 인해 용의자는 고통을 느끼고 그의 행복 혹은 공리 수준은 급격히 떨어진다. 하지만 폭탄이 터지면 죄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날아가게 된다. 따라서 당신은 공리주의 논리를 내세워, 엄청난 인명 피해와 고통을 막을 수만 있다면 한 사람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는 행위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반드시 고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공리주의자들은 실제적인 이유로 고문 반대. 강압을 받는 자백은 흔히 믿을만한 정보가 아니며, 고문이 효과없음. 고통을 가해도 공동체가 더 안전해지지 않음 전체 공리도 늘어나지 않음69. 우리나라가 고문을 하면 우리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을 때 더 혹독한 대우를 받을 수 있고 결과적으로 고문의 사용은 전체 공리를 줄일 수 있음. 그러나 이러한 반대 주장의 근거 역시 공리주의자들의 찬성 근거와 전적으로 일치. 이들은 인간을 고문하는 행위가 근본적인 잘못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고문이 나쁜 영향을 주며, 전체적으로 이익보다 해가 많다고 주장할 뿐. 어떤 사람은 고문을 원칙적으로 반대. 고문이 인권을 침해하며 인간의 타고난 존엄성을 짓밟는다고 믿는다. 이런 반대는 공리주의 사고에 근거하지 않음. 그들은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은 공리를 넘어서는 도덕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 그들이 옳다면 벤담의 철학은 틀렸다. 언뜻보아 시한폭탄 이야기는 벤담측 주장을 지지하는 사롈처럼 보인다. 숫자가 아무래도 도덕적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구명보트에서 죄없는 사환 소년을 희생시키지 말고 다른 세명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과는 다른 이야기. 시한폭탄이 곧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 수천 명의 무고한 목숨이 위험에 빠져 있다면? 그 피해가 수만명에 이를 수 있다면? 바로 이 타이밍이 정의의 이름으로 슈퍼맨이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ㅋㅋ예상되는 피해자의 숫자가 많으면 공리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할 것이다. 아무리 인권을 열렬히 옹호하는 사람이라도, (...)주장하기 힘들 것. 70. 하지만 공리주의의 도덕적 추론을 시험하기에 시한폭탄 이야기는 적절치 않다. 이는 숫자의 중요성을 강조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경우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에 대한 양심의 가책도 얼마든지 버릴 수 있음을 증명하려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잉라면 도덕은 결국 비용과 이익을 계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테러리스트의 고문을 합리하고자 하는 예는 아니다. 우리는 그가 테러리스트라고 확신하고 있는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이 시한폭탄 이야기를 수정해서 그의 어린 딸을 고문해서 알아내려 한다면? 이는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행위일까? 71. 행복한 도시 죄없는 딸을 고문하는 두 번째 고문이야기는 어슐러 르 귄의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축복받은 도시지만 지하에 한 아이가 비참한 상태로 갇혀있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아이가 그곳에 있음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 오멜라스가 누렸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그것이 계약이다. 72.과연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일까? 벤담의 공리주의에 대한 첫 번째 반박, 즉 인간의 기본권 존중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무리 도시 전체가 행복해진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고 말한다. 다수의 행복을위해서라 하더라도 죄 없는 아이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잘못이다.  반박2: 가치를 재는 단일 통화공리주의는 행복의 측정, 합산, 계산을 기초로 도덕과학을 제공. 기호는 동등하게 계산. 사적 판단을 배제하는 태도 덕분에 공리주의는 호소력 지님. 하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를 통일된 단위로 바꾸는 과정에서 아무것73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두번째 반박은 바로 이런 의문에서 나옴 모든 가치는 공통된 하나의 단위로 평가될 수 없다. 폐암의 이익필립모리스가 체코에서 낸 연구 보고서(흡연연구가 비용, 편익 분석, 그리고밑바탕의 공리주의 사고방식의 부도덕성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공리주의자들도 흡연자의 고통, 슬픔에 빠진 가족, 생명의 손실처럼 흡연과 이로 인한 보다 광범위한 결과들의 관련성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벤담은 인간의 생명을 비롯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다양한 가치를하나의 잣대로 측량하겠다는 의도로 공리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그러면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 사람들이 분노한 이유는 인간의 생명 가치를 계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폭발하는 연료 탱크 포드 자동차의 핀토는 1970년대 가장 많이 팔린 소형 자동차. 그런데 불행히도 뒤에 따라오던 차가 이 차를 들이받으면 연료탱크가 쉽게 폭발했다. 연료탱크를 안전하게 바꾸어 주는 장치는 차 한 대당 11달러가 드는데, 그에 따른 이익(생명을 구하고 부상을 방지하는 등)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안전장치를 안달았던 것. 76. 노인의 목숨값 할인 계산 논란미국환경보호국. 77.2003년, 새로운 대기 오염 기준을 바탕으로 비용, 편익 분석을 내놓았다. 깨끗해진 공기 덕분에 살릴 수 있는 사람의 목숨값은 1인당 3270만달러, 70세 이상의 노인은 230만 달러. 공리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같은 사례를 증거로 내세워, 비용, 편익 분석을 적용하여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옳지 않다고 지적. 1974 석유파동으로 자동차 속도를 줄이자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줄었음. 그런데 두 명의 경제학자가 시간의 절약의 경제적 이익을 계산해보니 운전속도를 높이는 것이 희생자가 발생하지만 경제적 이익이 더 컸다. 79. 공리주의자들은 사람 목숨을 돈으로 환산할 때 느끼는 거부감을 극복해야 할 충동적 감정이자, 명확한 사고와 이성적인 사회적 선택을 방해하는 터부로 보았다. 하지만 공리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부감이야말로 도덕적으로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가리키는 징표라고 본다. 그들은 모둔 가치와 재산을 단일 잣대로 계량하거나 비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고통의 대가를 계량하는 실험1930년대에 사회 심리학자 에드워드 손다이크는 공리주의의 가정을 증명하려고 했다. 즉 완전히 별개로 보이는 욕구와 혐오도 쾌락과 고통이라는 통일된 단위로 환산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았다. 얼마를 받는다면 위쪽 앞니 하나를 ? 발가락 하나를 절단? 15센치 지렁이 꿀꺽? ..... 80. 손다이크는 이 결과가 모든 행위는 하나의 잣대로 계량되고 비교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생각했다. "바람이나 욕구도 그 양이 존재하므로 측량할 수 있다. 개, 고양이, 닭의 생명은 (...) 대개 식욕, 욕구, 열망, 만족으로 구성되고 결정된다.(...)인간의 목숨 역시 바람이 좀 더 다양하고 미묘하고 복잡하지만 마찬가지다.  도덕적 행위를 계량하려는 시도옥스퍼드 대학원생 1970년대 세인트 앤스 대학에서도 일주일에 최대 세 명까지 방문객 허용, 하룻밤에 50펜스. 82. 가디언지에 해드라인 '세인트 앤스 여학생들, 하룻밤에 50펜스'미덕의 언어가 공리주의 언어로 그다지 훌륭하게 번역되지 못한 것. 존 스튜어트 밀우리는 지금까지 벤담의 '최대 행복'원칙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살펴보았다. 하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권리를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도덕적 문제를 모두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비판. 이러한 반박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그러한 반박에 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벤담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밀은 계산 원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공리주의를 보다 인간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공리주의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밀은 벤담의 친구이자 제자인 제임스 밀의 아들이다. 83. 자유옹호밀의 저서를 보면 그가 아버지와 벤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공리주의와 개인의 권리 주장 사이의 철학적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밀의 저서 <자유론>(1859)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년 영어권의 고전. 이 책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느느 내용을 담고 있다. 84. 개인의 자유와 반대할 권리를 지지하면 궁극적으로 사회의 복지가 증진된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뭘까? 밀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우선 반대 의견이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옳으느 것으로 드러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다수의 의견을 수정할 수 있다. 반대 의견이 옳지 않은 것이었다고 해도,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이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다수 의견이 독단이나 편견으로 흐르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관습과 관례에 따르길 강요하는 사회는 체제 순응에 빠지기 쉽고 사회 발전을 촉진하느느 에너지와 활기를 잃기 쉽기 때문이다.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