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도서<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드라마<낭만닥터 김사부 2> +영화<작은 아씨들> =√죽음
도서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을 한 달 내내 가방에 넣고 다녔다.
그 사이 '우한폐렴'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또 '코로나19'로 이름이 정치적으로 또는 학명적으로 우아하게 바뀌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우한에 다녀온 이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생기고 또 그의 이동경로에 접촉자가 있어 또 다른 확진자로 증식되는 뉴스를 접한다.
그러자 나의 일상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평소 눈뜨자마자 확인하는 것은 대기질을 알려주는 앱이었는데 이제는 확진자가 더 없나, 어느 동네인가 체크하는 것이 주 일과가 된다. 바이러스 증식보다 더 빠른 것은 엄마들의 정보력. 문제는 이게 진짜뉴스이냐 가짜뉴스이냐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더 낫지 않나하는 불안감에 코로나 뉴스검색과 카톡방 순회시간이 늘었다. 각종 모임이 휴강되었다. 심지어 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도 학부모 참석금지. 유치원선생님이 마지막으로 보내주신 사진에는 흰 마스크 쓴 시커먼 졸업가운을 입은 아이들이 김밥처럼 서 있다. 마스크에 가려져 졸업을 해서 아쉬운 표정인지, 친구들과 함께 있으니 졸업식마저 즐거운 표정인지도 모르겠는 그런 단체사진이다. 나중에 다시 보아도 그 날을 떠올릴 추억이 1도 보이지않는 그런 형식 상의 졸업사진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바뀌어버렸다.
그래도 우리나라의 경우 사망자는 없지만 옆나라 중국은2020년 1월 21일 첫 사망자 발생일부터 오늘까지도 중국의 그 수많은 목숨들이 주검이되어 실려나간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위태위태한 목숨들은 감염을 막아주는 방어복과 고글을 쓰고 흰 장갑으로 중무장한 의료진들 사이에서 가족과 격리된 채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사망선고를 받고 있겠구나 싶은 것이.. 참..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러다가 낭만닥터 김사부 2의 8회를 보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긴급한 두 명의 환자가 돌담병원 응급실로 실려온다. 한 명은 구급대원 활동 중 의식을 잃은 여성과, 다른 한 명은 사람을 둘이나 죽인 살인범. 평소 투석을 받아 연명하던 이 살인범 환자의 경우 염증 수치가 높아 신장이식 외에는 답이 없던 상황.
뇌사 상태가 되어버린 딸(구급대원)을 바라보며 엄마는 김사부(한석규)에게 장기기증카드와 주민등록증을 넘긴다. 하지만 딸의 신장이 살인범에게 이식될 것을 알고는 허락하지 않는다.
살인범환자의 엄마가 구급대원 환자의 엄마에게 하소연한다. 공부잘하는 한약을 지어 먹인 아들은 신장이 망가져 평생 투석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왕따가 되었다고 한다. 맞다가 맞다가 둘을 죽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살인자가 되었다. 결국 마지막까지도 사람을 살리고 가는 구나 울며 장기기증을 위한 수술대에 보내는 구급대원의 엄마.
바로 이 부분을 보다가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와닿았다.의식없는 채로 그저 심장을 멈추지 못하게 연명치료를 하는 것은 진심으로 환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환자가 숨을 쉬고 있다고 해도 의식이 없으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차라리 그 상태가 되기 전에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최소한 작별 인사를 나눌 시간을 갖자는 것. 구급대원처럼 급사하여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엄마 딸로 와줘서 고마워, 사랑해"라고 말해봤자 식물인간 딸에겐 들리지않고 시청자의 눈물을 짜내는 장면에 불과해진다는 그 불편한 진실말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미처 죽음을 맞을 준비를 못했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응당 효도라 생각하는 주변의 눈을 의식한 눈치게임이거나 그 결정은 일반인이 아닌 의료진들이 해주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일 뿐이라는 이 힘든 말을 에둘러 에둘러, 저자는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어제 본 영화, <작은아씨들>에서 바닷가에 데려가 베쓰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아주겠다는 조에게 베쓰는, 자기는 죽음에 대해 하도 많이 생각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며 "죽음은 썰물과 같아, 천천히 가지만 꼭 지나가는 거야"라고 오히려 조를 위로한다. 곧 썰물이 닥칠 바닷가에서, 꼬옥 안고 있는 두 자매 위로 바닷바람이 하얀 모래를 뿌리며 지나간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렇게 내가 가방을 열고 닫을 때마다 내 눈에 띈 이 책의 죽음이라는 화두는 이렇게 한 달동안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나의 부모는 연세가 지긋하시다.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내일이라도 갑자기 전화를 받는다해도 남들 눈에는 적당한 연세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스며들기 시작한 바닷가의 모래 사장일 수도 있다.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내가 특별히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저 한번이라도 더 전화를 걸고 우리가족이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 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제는 '나의 죽음'이라는 영역까지도 그렇게 두렵거나 회피하거나 소스라칠 정도로 무섭진 않다. 단지 내가 갑자기 죽어버려서 나의 주변인들 특히 남겨진 가족에게 들이닥칠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더욱 가중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커진다. 그것이 내가 한번 더 죽음에 대해 준비해두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