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나를 부르는 숲, 빌 브라이슨

MyDearmoon 2020. 6. 8. 19:25

언제 곰이 튀어나오는지 궁금해서 쭈욱 읽게 된 책.(책 표지에 곰얼굴이..) 다 읽은 후에는 아.. 작가가 곰을 닮았네 무릎을 치게 되는 책.

이 숲으로의 여정은 꼭 트레킹 과정 뿐 아니라 내가 토지를 읽어나가던 과정도 떠오르게 한다. 무언가 해보고 싶었다가 중도포기하여 못난 놈 하고 자학하던 나에게, 3800킬로미터의 여정중 한 39.9%를 걸은 빌에게 카츠가 "그래도 우린 거기 있었어"라고 말한 부분에서 위로를 받았다.

비문학인지 문학인지 엄청 헷갈린 책.

카츠같은 친구가 (우리집 가까이에 사는 건 싫지만 ㅋㅋ) 있었으면 하고 생각한 책.

영국으로 귀화했다지만 역시나 미국놈책이라고 느낀 책.

1. 나를 부르는 중랑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었던 나는, 면목동으로 이사오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비록 하수구 냄새 풍기는 천변이긴 하지만 슬이와 많은 시간들을 보낸 소중한 곳이다. 숲처럼 날 것의 장소는 아니지만 벚나무들이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것을 보며 시간이 흐른다는 것,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신의 섭리를 따르는 자연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중랑천에서의 경험은 자연스레 근처 배봉산으로 이끌었다. 배봉산 역시 둘레길이라는 인공적인 나무발판으로 만들어진 길이지만 어린 슬이를 데리고 가기 좋았다. 육아가 나를 숲으로 부른 셈이다. 슬이가 있었기에 나는 중랑천으로 나가고 배봉산을 올랐다. 슬이와 나. 빌과 카츠.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만든 매카이와 애버리처럼 같이. 함께.

2. 우리


숲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있어 함께할 친구는 필요없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1분 1초 기록에 걸리적거릴뿐. 하지만 이 숲으로의 대장정은 같이 출발하더라도 혼자만의 싸움임에는 분명하다.

"1996년 3월 9일. 이제 출발이다. <...> 봉우리를 향해 30미터쯤 갔을까. 눈알이 튀어나오고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혀서 멈추어 섰다. 카츠는 벌써 뒤로 처져서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묵묵히 전진했다. 지옥이었다.<...>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겨운 투쟁이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리 걸어도 끊임없이 새로운 봉우리가 나온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p. 61)"


그러나 혼자만의 싸움인 줄 알았던 투쟁 중 동료애를 느끼는 빌. 그런 빌의 내면을 표현한 그의 문장에는 어느 순간 "우리는"이라는 주어가 곳곳에서 보인다.

"진창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걸려 넘어지고, 무릎이 꺾이고, 배낭을 빠뜨리면서 고통스럽게 나아갔다. 우리가 손을 대는 모든 것에 진흙 덩어리가 덕지덕지 묻었다.(p.161)"

그 동료애, 아마도 다른 말로 우정이라 불리울 법한 이 단어는 그들을 함께 나아가게 한다. 카츠만 해도 여자, 크림소다, 엑스파일 앞에서 그는 얼마나 쉬운 사람인가. 그런 그가 빌과 함께 하기에 한발 한발 이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나아간다. 빌도 그가 그런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우리'가 되어, 숲이라는 공간에서 그 곳을 함께 걷는 시간들을 쌓아 우정이라는 것을 만들어간다.

난 이들이 우정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가장 부러웠다. 나는 왜 그 시절 카츠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오롯이 함께 하지 못했을까? 나의 그 시간과 공간을 왜 그렇게 아까워했을까?

아마도 곧 슬이에게 빌이나 카츠같은 친구가 생겨 우정을 알게되는 그 즈음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 슬이에게 선뜻 시간과 공간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나눌, 그리고 이 세상의 무시무시한 곰과 싸워줄 그런 멋진 친구가 곁에 있기를. 나는 바란다.